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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날짜 2016-07-06
제목 [기사] 한겨레신문 <곽병찬의 향원익청>"지워진 민족해방의 신앙"
내용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1073.html

일러스트레이션 최은영
일러스트레이션 최은영
곽병찬의 향원익청
임시정부 국무위원급에 올랐던 대종교 교도만 37명에 이르렀다. 이런 독립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대종교가 한민족 정체성의 원천으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뿌리(단군), 한민족이 추구할 가치(홍익인간), 그리고 국가적 축전(개천절) 등은 모두 대종교에서 비롯됐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의 만주군 장교 박정희에게는 대종교가 불편했다. 대종교는 국수주의적 신화이거나 시대착오적 신앙으로 매도됐다. 그와 함께 독립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10만여명의 넋과 민족의 제단에 저희 몸을 바친 선각자들의 희생도 모두 지워졌다.

“일본의 병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 … 2000만 동포는 국민 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해야….”

1918년 음력 11월, 만주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해외로 망명한 저명인사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를 발표한다. 김교헌 김동삼 조용은 신규식 이상룡 이동녕 박은식 이시영 이동휘 윤세복 신채호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등. 선언은 만주의 화룡현 삼도구 대종교 총본사에서 이루어졌다. 김교헌은 대종교 2대 종사였고, 윤세복은 김교헌의 뒤를 이어 3대 종사가 될 후계자였다. 선언문 기초자인 조소앙을 비롯해 나머지 대다수 참여자들도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무오독립선언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선언의 뒤를 이어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서울에서 3·1독립선언과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잇따랐다. 독립운동의 자취를 좇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게 대종교다. 오른쪽 왼쪽 혹은 나라 안팎 어디에서 접근하든 무장투쟁 노선이든 외교 노선이든, 한글이나 국학 등 문화운동이든, 독립운동의 모든 길목엔 대종교가 있다. 지금은 주류로부터 미신 혹은 국수주의적 망상으로 매도당하지만, 일제하에서 대종교는 민족 정체성의 원천이었고, 민족 해방운동의 이념이었다.

청산리 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는 무오독립선언 10개월 뒤 대종교 종사인 백포 서일에 의해 발족됐다. 총재 서일에 사령관 김좌진이었다. 두 사람 외에 현천묵 조성환 이장녕 김규식 이범석 계화 정신 이홍래 나중 박성태 등 주요 간부나 전투병 역시 대부분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역시 대종교 교도였고, 서일은 청산리 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연합체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시영 역시 대종교 교도였다. 사실상 대종교가 총체적으로 나선 무오독립선언의 무장투쟁노선(‘육탄혈전’)은 그렇게 구체화됐다. 나아가 1923년 김원봉의 부탁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 강령 ‘조선혁명선언’도 그 연장에서 나왔다.

1910년 대종교의 중광(다시 섬)을 선언한 홍암 나철 대종사는 1911년 총본사를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고, 5개 교구를 두었다. 단군조선의 강역을 전제로 백두산 기슭에 총본사를 두고, 동만주와 연해주를 담당하는 동도교구(책임자 서일), 상하이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서도교구(책임자 신규식), 북만주의 북도교구(책임자 이상설), 백두산 이남 한반도의 남도교구(책임자 강우) 그리고 해외교구를 둔 것이다. 동도교구엔 북로군정서의 용장들 이외에 윤정현 황학수 김승학 김혁 윤복영 여준 이동하 한기욱 등 무장투쟁가들이 있었다. 서도교구에선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신규식과 김구 이동녕 이상룡 이시영 안재홍 김규식 신채호 박은식 등이 활약했다. 임정 국무위원급에 올랐던 교도만 37명에 이르렀다.

이런 독립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대종교가 한민족 정체성의 원천으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뿌리(단군), 한민족이 추구할 가치(홍익인간), 그리고 국가적 축전(개천절) 등은 모두 대종교에서 비롯됐다.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가 축전일로 선포한 게 개천절이었다. 단기(단군기원, 서기 전 2333년)는 1904년 홍암이 처음 쓴 이래, 1905년 <황성신문>이 4월1일자(1905호)부터, 그리고 <대한매일신보>가 8월1일자부터 썼다. <만세보> <예수교회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등 국내외 신문이 그 뒤를 따랐다. ‘배달민족으로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백범 김구의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윤동주 송몽규가 다닌 간도의 명동학교에서도 설립자 김약연 목사는 교실에 단군 초상화를 걸었으며, 예배당엔 십자가와 단군기를 나란히 걸었다. 종교와 신앙을 떠나 대종교의 종지는 조선의 정체성이었다.

국학과 말글살이 운동에서도 대종교 지도자들은 그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선 민족주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중화주의만 존재했을 뿐이다. 신채호도 대종교를 경험한 이후에야 민족주의적 사관을 체계화했다. 단재는 윤세복(대종교 3대 종사)이 회장이던 광복회에서 부회장을 맡았고,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가서 대종교 종립학원인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가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것은 봉천 회인현의 대종교 종립 동창학교 교사 시절이었다.

박은식 역시 애초 중화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입교 후 <대동고대사론> 등을 통해 유교적 사대주의 청산을 강조했다. 사상가이자 역사학도였던 2대 종사 무원 김교헌은 조선 역사에 만주를 포함시켜, 조선의 역사를 신라와 발해, 고려와 요금, 조선과 청 등의 남북조시대로 정리했다. 이런 사관은 이상룡 정인보 유인식 유근 안재홍 장도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글 운동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것도 대종교 교도였다. 한글의 아버지로 꼽히는 한힌샘 주시경은 애초 기독교 세례교인이었지만, 대종교에 입교한 뒤 한글의 체계화 및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직계 제자인 김두봉 조선어연구회 회장은 홍암의 6인 시자 가운데 수석시자였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이었던 이극로는 윤세복 종사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홍암이 김두봉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윤세복은 이극로를 후계로 점찍기도 했다. 이극로는 윤세복의 지원으로 유럽 어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워 한글을 체계화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를 함께 이끌었던 신명균 최현배 이병기 권덕규 이윤재 이희승 등도 대종교 교도였다. 언어학자이자 역사학도였던 정신은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의 핵심요원이었다. 그는 <사지통속고>를 남겼다. 한글과 함께 에스페란토를 사랑했던 백남규(한국에스페란토학회장 역임) 역시 대종교 비밀결사인 귀일당 요원이었다.

국학 운동을 이끈 위당 정인보도 대종교 교도였다. 역사학, 양명학, 한학 등 국학의 거두였던 정인보는 ‘얼이 빠지면’ 학문도 헛것이고, 예교도 빈 탈이며, 문장은 허깨비가 되고, 역사정신 또한 공허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문학 통사를 확립하려 했던 자산 안확이나 최남선 현진건 이병기도 마찬가지였다. 현진건은 <동아일보>에 ‘단군성적순례’를 연재했다. 임정의 건국 기본이념으로 채택된 조소앙의 삼균주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안호상의 한백성주의는 모두 홍익인간 정신을 사상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 민족경제 실천에 앞장선 안희제,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등도 신심이 두터웠다.

대종교의 역할과 위상이 이렇다 보니, 해방 후 집권한 이승만도 대종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초대 내각에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안호상 문교부 장관, 명제세 심계원장, 정인보 감찰위원장, 신성모 국방장관을 포함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민세 안재홍은 미군정청 민정장관이었다. 물론 집권 초기 이들에게서 정통성의 단물만 취하려는 이승만과 홍익인간에 기초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꿈꾸던 이들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김두봉 이극로 정열모 유열 정인보 권덕규 안재홍 명제세 등은 6·25 전쟁 이전 월북하거나 전쟁 중 납북됐다. 대종교를 소외시키려던 이승만에게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의 만주군 장교 박정희에게도 대종교는 불편했다. 이들의 시대를 거치며 대종교는 국수주의적 신화이거나 시대착오적 신앙으로 매도됐다. 그와 함께 독립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10만여명의 넋과 민족의 제단에 저희 몸을 바친 선각자들의 희생도 모두 지워졌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모두가 근본을 잊으며 근원을 저버림에, 귀신이 휘파람 하고 도깨비가 뛰노니 사람겨레의 피 고기가 번지르르하도다. … 날이 저물고 길이 아득한데 인간이 어디메뇨?” 홍암은 1916년 8월 근본, 곧 인간세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결했다.

그로부터 100년. 이제 근본이 다시 섰는가? 휘파람 불며 날뛰던 귀신과 도깨비는 사라졌는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