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은 첨단 과학을 연구하는 이학박사로, 7대 종단의 하나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가 됐다. 최 삼일원장이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의 벌교 생가 뜰에 앉아 대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은 첨단 과학을 연구하는 이학박사로, 7대 종단의 하나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가 됐다. 최 삼일원장이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의 벌교 생가 뜰에 앉아 대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종교 최고 이론가 최윤수 삼일원장
“5적을 베어서 내부의 병통을 제거한다면 우리와 우리 자손은 길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사느냐가 여러분에 있고 죽느냐가 여러분께 있습니다. 제가 부족한 몸으로 이 의거를 주창하면서 오늘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피를 씻으며 이 의거를 우리 혈성 있고 용기있는 여러분의 가슴에 제출합니다.”

전남 벌교에 있는 대종교 교주 흥암 나철(나인영)의 생가에 있는 ‘을사오적처단 격려문’은 당시 민족 지도자의 울분과 결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나철이 조직한 을사오적처단을 위한 암살단은 을사조약을 체결(1905년11월17일)한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갔다. 암살단의 일원인 이홍래는 당시 농공상부대신이었던 권중현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양복을 차려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나왔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이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홍래가 그 사이를 뚫고 뛰어들어가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외치며 허리에 찬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아 이홍래는 붙잡혔다.

당시 신도 30만명을 거느린, 강력했던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이끌던 나철이 조천(사망)한 지 올해가 100년이 된다.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도 실패하고 일제의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나철은 이를 자신의 부덕함으로 여겼다. 1916년 8월15일 구월산 삼성사에 간 나철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낸 뒤 수도실로 들어가 ‘오늘 새벽부터 3일간 단식 수도를 하니 이 문을 열지 말라’는 글을 써 붙이고 잠갔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흰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나철은 숨진 채 발견됐다. 나철은 스스로 숨 쉬는 것을 멈춰, 숨을 거둔 것이다. 이런 폐기에 의한 죽음은 최고의 수행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고교 때부터 장자 백번 넘게 읽고
대학시절에도 사서삼경 놓지 않아

물리학 전공하고 연구소 책임연구원
평일엔 연구생활, 일요일엔 교리 강술

나철 대종사 스스로 숨 멈춰
숨 거둔 지 올해로 100년

‘을사오적 처단’ 암살 실패 뒤
‘나라는 망했어도 겨레는 있다’며
700년간 묻혔던 민족사상에 새 빛

잠깐 쉬며 1년여 각종 경전 탐구

나철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을 조직한 항일운동가이자, 민간에 숨어 있던 대종교가 다시 빛을 보게 한 종교지도자였다. 당시 대종교는 신도가 30만명에 이르는 큰 종교 교단이었다. 벌교에 있는 나철 생가의 참배실에는 나철이 순교하기 전에 사진관에서 찍은 전신사진이 있다.
나철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을 조직한 항일운동가이자, 민간에 숨어 있던 대종교가 다시 빛을 보게 한 종교지도자였다. 당시 대종교는 신도가 30만명에 이르는 큰 종교 교단이었다. 벌교에 있는 나철 생가의 참배실에는 나철이 순교하기 전에 사진관에서 찍은 전신사진이 있다.
지난달 18일 벌교의 나철 생가를 찾은 최윤수(58) 대종교 삼일원장은 나철 대종사께 참배를 한 뒤 뜨락에 앉아 대종사를 기렸다. 봄을 기다리는 햇살은 따뜻했다. 삼일원장은 대종교의 교리를 총관장하는 교육기관인 도원의 책임자다. 흰 예복에 노란 띠를 양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대종교 특유의 복장을 한 그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한 목소리로 나철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최 삼일원장은 독특한 이력의 종교인이다. 전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에서 석사를, 포항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과학자다. 그가 연구한 것은 흔히 ‘제4의 물질’이라고 불리는 플라즈마다. 지금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아직도 그가 30년을 근무한 연구소에서는 그가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인 것을 모른다고 한다. 그는 평일에는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일요일엔 대종교 교인들 앞에서 교리를 강술한다.

그는 고교시절 장자를 백번 넘게 읽을 정도로 동양 사상에 심취했다. 대학시절에도 사서삼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선도와 전통 양생술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소설 <단>을 읽고 한민족의 선도에 빠져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회사의 연구소에 취직해 3년 반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1년 반 동안 각종 경전을 연구했다. 다시 연구소에 취직한 그는 속세인으로 생활하면서 대종교 교인으로 단군사상을 연구했다.

백두산 도인 단군교 신도 만나

그의 선비같은 풍모가 나철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나철은 암살단을 조직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릴 때부터 고운 심성을 지녔다고 한다. 최 삼일원장은 “대종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어요. 9살 때 서당에 가서 한학을 배웠는데, 총명해서 훈장 선생이 ‘이 마을에서 신동이 태어났다’고 칭찬할 정도였죠. 마음씨도 착해 누나들이 병아리를 먹인다고 개구리를 잡아오면 빼앗아 물에 넣어 살여주었고, 뱀을 만나면 나무막대로 밀어서 풀숲으로 돌려보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29살에 과거에 급제한 나철은 관직에 조금 머물다가 시대적인 부조리에 분개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서 대원을 모집하고 거사를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감옥에 갇혔다. 나철을 아낀 고종황제는 그의 유배형을 풀어줬다. “아마도 대종사는 무력으로 하는 항일에 한계를 느낀 것 같아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 관리를 만나 한국, 일본, 중국이 동맹을 맺고 서양에 대적하자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했어요.”

일본에 머물고 있던 나철은 한 노인을 만난다. 그는 백두산 도인 백봉이 이끌던 단군교의 신도인 백전이다. 나철은 노인을 만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최 삼일원장은 “대종사는 ‘나라는 망했어도 겨레는 있다’며, 살아 있는 겨레에 대한 종교적 교화 운동이 참된 구국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독립은 몇 사람의 외교적 노력이나 암살 등의 방법으로는 어렵고, 주권을 강탈당하고 식민지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대주의에 있다고 생각해 그것을 극복하고 겨레의 정기를 모으기 위해선 고유한 사상을 부활시켜야 된다고 확신한 거죠”라고 설명한다.

근대한국의 자생종교 가운데 최제우의 동학, 강증산의 증산교, 박중빈의 원불교는 교주의 강렬한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창시된 것에 비해, 나철의 대종교는 이미 있었던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나철은 고려 중엽 이후 700년간 어둠에 잠겼던 대종교를 다시 밝혔다는 의미에서 중광이란 표현을 썼다.

최 삼일원장은 “단군 왕검시대부터 하느님을 숭배하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의 제천의식을 거행한 우리 겨레 고유의 신앙 형태이었던 대종교는 중국, 인도나 서양의 외래 종교들에 밀려서 민간에 전승되어 오다가 대종사가 빛을 보게 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깨달음 얻는 지름길은 삼법수행

최 삼일원장은 대종교의 ‘삼법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한다. “눈을 감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무념무상하게 마음을 비우는 것이 지감법의 출발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 통일하여 기도하며 깊이 호흡하는 것은 조식법의 기본입니다. 경전을 소리 내어 읽거나 외움은 금촉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최 삼일원장은 대종사의 사상을 집약한 계시문을 설명한다. “순왈도 일일성 물작사 물복식 도자정 성자검 부자기 통(純曰道 日日誠 勿作事 勿服飾 道者靜 誠者儉 不自欺 通, 순수한 것을 도라 한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 하라. 일을 꾸미지 말며, 장식하지 말라. 도는 고요함이요, 정성은 검소함이니, 스스로 속이지 않을 때 통한다)의 22자는 대종사가 10년 동안 입산수도 수행중에 받은 계시문으로 대종사의 종교생활을 압축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종교는 대종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나철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와 나철이 숨진 북한의 구월산 삼성사를 참배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라는 말도 있어요. 바로 내 뒤에, 나와 함께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곳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첨단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입에서 나오는 대종교 이야기이다.

벌교/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