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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날짜 201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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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천 4474년 8월 13일 제 74-33호
내용 백산 안희제 대형의 파란만장한 헌신

74.8.13



-최윤수 삼일원장-



백산 대형은 1885년 경남 의령에서 지방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형은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을사5조약 강제체결 이후 대형은 대중들을 계몽해야 되는데 국권회복을 위해서 신학문을 통한 자주독립 사상 고취가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대형은 고향인 의령을 중심으로 영남각지를 순회하면서 민중계몽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열정적으로 교육사업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1909년 10월 경부터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항일운동을 했다. 이 단체에는 윤세복 종사나 이극로 등 후에 대종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10명이나 된다. 대형은 1911년 10월 3일에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4년 영계를 받았다.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대형은 1916년에 고향 전답을 팔아서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창립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으로 돈이 자꾸 들어가서 언제나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1928년까지 계속 이어나갔다. 1929년 대형은 언론의 중요성을 생각해서 중외일보를 경영했다. 대형은 신문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언제나 사회의 공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신문사를 경영하는 신문경영인들은 대중을 위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됨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외일보도 언론투쟁을 전개해서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고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형은 중외일보를 양도한 후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그가 구상해오던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실현하기 위하여 1933년에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였다. 대형은 가산을 정리하여 1931년부터 친구인 김태원과 함께 동경성에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목단강 상류의 일부를 석축으로 강을 막아 농지에 수로를 대어 광활한 땅을 개간했다. 발해농장에는 주로 남한지역 이주한인 3백여호를 정착시키고 안희제가 고안한 자작농창제를 시행했다. 자작농창제란 이주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 절반을 수곡하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지 개간과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고, 5년 후에는 또 다른 지역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게 하면서 아울러 농민에게 토지는 무상으로 분배하여 자작농을 육성하는 제도였다. 이와 함께 이주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동경성 중앙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발해농장은 대형이 만주에 있는 동포들과 함께 대종교적인 이상사회인 홍익인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계획했던 사업이었다. 대형은 발해농장을 통해 농장을 경영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끌어모아 무장투쟁을 하기 위한 힘을 기르는 데에 최종 목적이 있었다. 발해농장이 옛 발해의 수도인 동경성에 소재하고 이름도 발해농장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농장사업에서 자금을 축적해 광복하고 나아가 고구려 발해를 이어 옛땅을 회복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하는 배달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던 것이다.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대형은 1934년 이후부터 대종교총본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6년에 포교금지가 되어 대종교가 침체기에 있었는데 박찬익 대형의 도움으로 포교금지령이 1931년에 해제되어 활발한 포교를 시작했다. 1934년 1월 하얼빈으로 가서 만주에 주재한 일제와 교섭하여 대종교 포교활동에 대한 양해를 받아 하얼빈에 대종교선도회를 설치했다. 이어서 대형은 동경성에 대종교총본사 현판을 달았다. 대형은 1935년에 참교의 교질을 받고 1936년에 지교와 경의원부원장, 1941년에는 대종교 상교로 승질하고 전강에 임명되면서 대종교서적간행회 회장으로도 특임되었다. 당시 서적간행회에서 출판한 서적은 홍범규제, 삼일신고 등 8종으로 발행부수는 1만 5천부 정도였고, 매년 4회에 걸쳐 교보도 간행하였다. 1942년 3월 대종교총본사에서는 발해고궁지에 천진전 건축을 추진하였는데 안희제는 다음달 4월 신병치료를 위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대종교의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어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임오교변을 일으켰다. 대형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출감 후 친척 아우인 안영제의 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순교하였다. 광복후 1946년 8월 15일 정교로 추승되었다.

대형은 대단히 실천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이었다. 그래서 백산상회나 중외일보 발해농장 등의 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실천에 옮겨 시작하였고 광복이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자까지 감수해서 사업은 성공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나 대종교에는 믿을 만하게 자금을 대주었다. 이러한 대형의 순교자적인 삶은 다 우리 겨레가 최고의 문화를 가졌다는 확신과 영원한 진리, 가장 큰 도를 가진 대종교에 대한 굳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후 김구선생이 귀국한 후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경주의 최부자 최준씨이다. 최씨가 경주에서 올라와 김구 선생이 있던 경교장에 들어가자 김구선생은 그를 반가이 맞았다. “많은 자금을 대어 주어 감사합니다” 라고 김구선생이 인사하며 백산을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던 돈의 명세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최씨가 그동안 백산에게 자의로 타의로 빼앗겼던 명세가 그대로 있었다. 최씨는 평소 백산에게 간 돈이 고스란히 한 푼도 떼이지 않고 임시정부로 갔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는데 확인을 하고서 그동안 의심했던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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