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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완기 날짜 2010-10-09
제목 [역사(종사)] 단군이란 말을 쓰지 말자
내용  

단군이란 말을 쓰지 말자

1. 단군

우리는 전해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군”이란 말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우리역사기록에서는 단군이라는 말의 연원을 찾기 어렵다. 다만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몇줄 언급한 것이 전부다. 이를 발췌해보면:

“단군이란 밝달임금을 번역한 것이다. 환웅(밝달나라 왕칭)과 환검(고조선 전기의 왕칭)이 모두 밝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단(檀)으로서 나라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곧 단군이란 단국의 임금이다. 우리말로 단(檀)을 밝달이라 하고 임금을 임검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밝달임금을)단군으로 번역하였는데 후세에는 단군이란 글자만 기록하고 단군이 밝달임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때문에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환웅의 나라가 밝달나라 였는데 환검(고조선 임금)은 나라를 새로 개국하였으니 환웅의 나라와 똑같은 “밝달나라”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원래의 단군이란 밝달나라의 18대 임금들인 환웅들을 지칭하는 중국식 용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밝달나라를 “밝달나무 단(檀)”자를 써서 “단국”이라고 번역했고 옛날에는 중국에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했으므로 환웅을 중국 한문식으로 “단군”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한웅왕조에서는 “환웅”이란 왕칭이 이미 있으므로 “밝달나라” 즉 “단국”의 임금을 “단군”이라고 번역하여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단군이야기는 한웅왕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밝달나라(단국) 14대 치우한웅이 중국동부를 개척하여 만주에 있던 밝달나라의 수도를 산동반도로 옮기고 국호를 청구국으로 하니 만주의 여러나라는 자동적으로 체후국가들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 지금의 길림성 일대가 옛 밝달나라의 터전이었으므로 나라이름이 그대로 밝달나라 즉 단국이란 제후국이 있었다. 이 제후국의 대읍을 맡아보다 나중에 단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이 “단국임금”은 한웅의 제후인 왕검이다. 단군이나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 해당된다.

단국임금을 후세의 한문으로 단군이라고 번역 했어도 단군은 한웅의 제후왕칭이다. 그런데 단군이란 제후왕칭을 속칭고조선이란 대국을 개국한 시조의 왕칭으로 쓰고 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국의 임금을 단군이라고도 하고 왕검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단군과 왕검은 한웅의 제후왕칭으로서 같은 말이다. 이 밝달나라 임금 즉 “단국임금”을 후세에 단군왕검이라고 잘못 전한 것이며 “단군왕검”은 “단군”도 제후국의 임금이고 “왕검”도 제후국의 임금이니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용어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무조건 사용하여 왔다.

왕검이 이름이 아니라 제후국의 왕칭이라는 것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나타난다.

“웅녀군(熊女君: 한웅의 황후친족 나라의 왕)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처음으로 단허(檀墟: 옛 밝달나라 의 땅)에 책봉 받아서 왕검(王儉: 제후 왕)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왕검들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 웅씨왕의 후계자 후보)이 되어 섭정한지 24년만에 웅씨왕(熊氏王: 웅족왕)이 전쟁중에 붕어하니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 되었다.”

위에서 치우한웅이 산동반도 청구에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한웅의 옛 밝날나라는 자동적으로 제후국이 되었는데 이 단허 즉 옛 한웅의 밝달나라 터전인 단국의 임금이 왕검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왕검은 한웅의 제후왕의 칭호이고 단국의 임금인 단군도 제후왕의 칭호이다. 왕검과 단군은 같은 제후왕의 칭호이다. 여기서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후세에 잘못 기록한 것이다.


삼국유사 왕검조선 이야기는 중국의 위서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의 시조부터 기록한 사마천의 중국역사에는 단군이란 용어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후세의 AD200년대(AD.250-316)에 쓴 중국 삼국지 집해서30 위서 동이전 38에 고조선의 시조가 “단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 고조선 당시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군“이란 용어가 중국이 강성해지면서 만주와 한반도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자 등장하게 되었을까? 한국의 역사책들은 발해 말과 고려시대에 쓰여 졌으니 위서보다 최소 600년 이상 뒤에 쓰여 졌으므로 모두 중국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썼다. 그러므로 “단군”이란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인용된 것이다.

단군세기에서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다”라는 대목은 왕검의 혈통이 한웅의 직계자손임을 주장하기 위한 조작으로 생각된다. 이는 마치 난생설화를 빌려 시조들을 신격화 한 것과 마찬가지다. 단웅 즉 한웅의 아들이면 국가와 왕위를 그대로 계승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나라를 새로 개국하는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고조선편의 단군이야기는 중간쯤에 한인으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밝달나라 시조 한웅이야기에 “한웅과 웅녀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바로 단군왕검이다”고 했는데  첫머리에서는 “위서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이때는 중국의 고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이 두가지 문장에서

한웅시대는 지금부터 약 5900년전이고 고조선개국은 4300년전이다. 그런데 5900년전에 태어난 단군왕검이 4300년 전의 고조선의 개국시조로 되어있다. 한웅시대 1565년을 완전히 삭제시킨 것이다. 한웅시대가 삭제되면 그 앞의 환인시대 3301년도 없어지게 된다. 결국 4900년간의 우리역사를 고조선 시조가 “단군‘이다 고 한 것 하나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중국측에서 중국보다 오래된 우리역사를 잘라내기 위하여 중국의 힘이 만주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위나라 때 단군을 고조선의 임금으로 기록했는데 우리역사서를 망실하고 후세의 고려와 이씨조선에서는 극심한 사대주의에 의하여 중국의 기록이 옳다고 보고 역사를 저술하였으니 중국의 술수에 놀아나고 말았다. 그 핵심이 바로 “단군”이란 용어이다.


1.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은 적통성을 주     장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본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 아니다. 단군이 한웅의 아     들이면 나라를 그대로 계승하면 되는데 나라이름을 바꾸고 수도를 옮기고 왕칭     까지 다른 전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필요가 없다.

2. 밝달나라 환웅의 아들이 단군이라면 “단군” 이란 왕자나 황태자라는 칭호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왕칭으로 사용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초대환웅의 아들 단군과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기)의 초대임금인 단군과는 무려     1565년이란 시간차이가 있다. 초대환웅의 아들인 단군이 어떻게 1565년 뒤의      고한국(속칭고조선 전기) 임금이 될 수 있는가?

4. 밝달나라 환웅시대의 제후들의 칭호가 “왕검”이다. “단군”도 제후국의 왕칭이다.     따라서 “단군” “왕검” “단군왕검” 등의 용어는 이름이 아니라 모두 제후왕칭이     다. 제후왕칭인 단군이나 단군왕검을 대국인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기)의 왕칭으     로 쓰지 않는다.

   우리상고사에서 특이한 것은 환국(桓國: 밝나라), 밝달국,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     기) 3왕조의 시조들의 실제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인씨, 환     웅씨, 단군씨, 왕검씨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

   한인시대의 시조를 "안파견"이라고 하는데 안파견은 "조상" 또는 "아버지"라는      존호이지 실제이름이 아니다. 한웅시대의 시조를 일반적으로 "거발"이라고 하는     데 거발은 우리말 "커밝"을 한문으로 번역한 말로서 지금말로는 "광명" 또는 "부     처"라는 뜻의 존호이지 실제이름이 아니다. 석가모니를 "부처"라고 하는 것과 같     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민족종교가들 그리고 민족정신 운동가들 중에는 환     인천제, 환웅천왕, 단군왕검이란 말을 일상으로 쓰고 있다. 환인, 환웅, 단군은      왕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왕칭인 천제, 천왕, 왕검을 덧붙여서     쓰니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민족은 천제나 천왕 그리고 천자 같은 용어를 사용     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환인천제, 환웅천왕, 치우천왕, 치우천자, 단군왕검”이     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5. 단군이란 밝달나라 임금을 후세에 한문으로 뜻이 통하는 “밝달나무 단(檀)”자와     중국에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했으므로 단군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했는데 중     국에서 고한국(속칭 고조선전기)의 시조로 잘못 기록한 것을 후세에 2000년 동     안 중국을 사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쓰게 된 용어로 보인다.

6. 어떤 사람들은 단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임금이란 뜻이라고 해괴한 주장을 하     는 사람도 있는데 옛날의 제사장은 곧 임금이고 임금은 곧 제사장으로서 제정일     치의 군장이니 제사장과 임금을 구분할 필요도 없었고 구분하지도 않았던 시대     이니 이러한 해석은 틀린 것이다.

7. 또 어떤 사람들은 몽고의 “텡그리”가 우리말 “당굴레”가 되고 이것이 “단군”으     로 되었다고 하는데 단군은 참도인이다. 참도인과 무당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따라서 참도인이 무당의 용어를 왕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8. 중국의 위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본다면 후세에 중국을 사대하고 또     중국의 압력과 조종에 의해서 중국보다 오래된 우리역사를 잘라내기 위해 환웅     즉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로 삼으니 고조선 이전의 역사(4900년)는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된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세조, 예종, 성종은 고사서를     수거하여 모두 불태운 기록이 있다.

   태종은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유학서적이 아닌 모든 서적을 불태웠고,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3년(1457년) 5월 26일,

                  예종 1년         9월 18일,

                  성종원년        12월  9일에 각각 고사서들의 수거령을 내렸     는데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삼성밀기, 표훈천사, 삼성비기,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동천록, 지화록 --- ”등의 고대사서들을 나라     에 바치면 상을 주고 감추면 참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교서를 내리고 수거하여      불태웠다.

   중국의 압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왕위를 지키기 위해 중국     에 아부하며 민족의 역사를 말살한 이조시대의 참상을 알 수 있다.

9. 중국은 이미 2100년 전에 사마천이 요제(堯帝), 순제(舜帝)와 같이 제왕으로 기     록하여 사용 했는데 한국은 제후의 칭호인 “단군”칭호를 지금까지 사용하니 자     동적으로 중국의 제후가 된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상고시대도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면 반박할 수 없다.

10. 만약 환웅시대(1565년)와 한검시대(2096년)를 모두 단군 시대로 본다면 약        3700년간을 모두 단군시대로 보아야 하니 왕조를 구분할 수 없다.

11. 우리식 칭호를 없애고 중국식(한문식) 칭호를 사용하니 중국의 연호를 쓰는 것      보다 더 못하다.